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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울 농민 볍씨 파종, 애달픈 꿈 들녘에 오롯이 박히다

◆ 출처 : 코리아포커스

2006-03-31 15:13 | VIEW : 4,518

들녘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모습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미군기지확장 문제로 시름하는 팽성읍 농민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 노순택

“농사꾼이 농사짓는 게 젤루 좋지, 더 좋은게 또 있을까”
[포토뉴스] 황새울 농민 볍씨 파종, 애달픈 꿈 들녘에 오롯이 박히다
노순택 / 황새울사진관 주인장 , 2006-04-03 오전 8: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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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노순택, 편집_문정현신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너른 들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허나 바람도 늙은 농부의 얼굴에 핀 웃음꽃을 빼앗지는 못했다.

“이것 한 번 봐. 이게 종자인디, 노오란 것이 얼마나 예뻐요. 이것 키워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니께. 이 예쁜 것이 땅에 콕 박혀서 싹을 띄우고, 물 먹고 햇볕 받아 쑥쑥 크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 좋다는 평택쌀이 영그는겨. 이런 좋은 땅에 농사를 짓지 않고, 전쟁기지를 짓는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여. 그것도 넘의 나라 군대를....”

지난 3월 6일과 15일, 국방부가 미군기지확장을 위한 강제집행을 시도하면서 평택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은 한시도 긴장의 고삐를 풀지 못한 채 한 달을 보냈다. 특히 15일 저항과정에서는 많은 주민과 인권활동가들이 다치거나 연행되었고,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씨가 구속되면서 주민들의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험난할 거라 걱정했던 논갈이를 큰 탈 없이 끝내고, 파종을 위한 준비까지 순탄하게 진행되면서 농민들의 얼굴에도 작은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예뻐요. 이것이 우리가 오늘 뿌릴 볍씨여." ⓒ 노순택

그리고 지난 주말.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은 봄바람 부는 들녘에 볍씨를 뿌렸다. 한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이들의 얼굴은 마치 처음 농사짓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설레임이 흥건했다. ‘올해 농사 짓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이제 두 걸음 뗐으니, 올해 농사는 가능하다’는 낙관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특히 도두리 농민들은 공동경작지 7만5천 평에 직접 손으로 볍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고, 흙을 덮어 주었다.

“아, 얼마나 좋은지 말로 해야 아는겨? 이거는 말로 설명을 해 줄 수가 없다니께. 좋아요, 좋아,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 농사꾼이 농사짓는 게 젤루 좋지, 어디 더 좋은 게 있나?”

오순도순 얘기를 나눠가며 팔을 휘둘러 볍씨를 뿌리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새들이 춤을 추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 노순택

물을 댄 논에 모내기를 하지 않고, 마른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농사법은 그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파종은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국방부의 강제집행에 맞서 반드시 농사를 짓겠다는 농민들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물론 국방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크게 부족해진 일손을 메우려면 어쩔 수 없이 일부 논에 ‘마른 논 파종’(건답직파)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기도 했다.

사방이 탁 트인 너른 들녘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순도순 얘기를 나눠가며 팔을 휘둘러 볍씨를 뿌리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새들이 춤을 추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고,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다. 농민들이다. 이들은 수천년 동안 하늘과 땅을 이어준 존귀한 매개자였다. ⓒ 노순택

농민들의 파종 장면을 영상에 담던 문정현 신부는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어서 뭘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따로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늙은 사제의 얼굴에 또박또박 써 있었다.

농민들은 마른들에 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볏짚 타는 소리에 맞춰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마른 짚이 타오르면서 뿜어대는 연기가 들판 가득 피어올랐다.

검은 재가 흩날리는 들녘에 볍씨를 뿌리고, 기러기가 주워 먹지 못하게 흙 덮어주는 작업이 끝없이 반복됐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갔다. 사흘 동한 7만5천평의 땅에 볍씨가 박혔다. 늙은 농부들의 애달픈 꿈이 도두리 들녘에, 황새울 들녘에 오롯이 박혔다. 그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따뜻한 햇살을 받아 품안 가득 열매를 맺어, 겸손하게 고개 숙일 수 있기를 농부들은 빌고 또 빌었다.

ⓒ 노순택

이 소박한 바람.
그저 농사짓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농부의 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묶게 한 자들이 대체 누구냐고, 따져 묻는 것은 공허하다. 우리는 이미 그 자들을 알고 있다. 뿐인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사실 알고 있다. 다만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은 해야 할 것이다. 그걸 걷어낼 수는 없을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늙은 농부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이들의 죽음 뒤엔, 우리의 죽음도 뒤따를 것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누구도 다가올 전쟁의 먹구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국방부는 농민들의 영농행위를 불법행위로 간주하고, 조만간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논이 파헤쳐지고, 논으로 향하는 수로가 차단되고, 철조망이 둘러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에 농민들의 가슴은 마르고, 탄다.

그날 저녁에도 대추분교 운동장의 비닐하우스는 환하게 밝았다.
농부들은 고된 들일을 하고도, 거르지 않고 촛불을 들었다. "사람을 먹여 살려온 이 너른 들녘에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를 만들어선 안된다"고, 외치고 또 외쳤다.

576일째였다.

농민들은 마른들에 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볏짚 타는 소리에 맞춰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마른 짚이 타오르면서 뿜어대는 연기가 들판 가득 피어올랐다. ⓒ 노순택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늙은 농부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이들의 죽음 뒤엔, 우리의 죽음도 뒤따를 것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누구도 다가올 전쟁의 먹구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 노순택

농부들은 고된 들일을 하고도, 거르지 않고 촛불을 들었다. 사람을 먹여 살려온 이 너른 들녘에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를 만들어선 안된다고, 외치고 또 외쳤다. 이 고단한 육신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을까. 꼭 쫓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하는 것일까.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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