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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순택의사진한장] 양심수, 김지태를 그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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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08 14:45 | VIEW : 2,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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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1월 6일, 드넓은 황새울 들녘을 바라보며. 왼쪽부터 대추리 김지태 이장, 도두리 이상열 이장, 함정리 김영오 이장. 평범한 시골이장이었던 이들은 고향이 파괴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항쟁지도자'가 됐을 뿐이다. 김지태 이장은 구속되었고, 이상열 이장은 이 기가막힌 사태를 어찌하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 노순택
양심수, 김지태를 그리며...
[노순택의 사진 한 장, 생각 잠깐 20] '시와 노래를 가장한, 항의시위'는 계속된다
노순택(nannaya) 기자
군홧발 정치가 끝나갈 무렵, 나는 학생이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하던가. 빛고을을 피로 물들였던 정치군인들은 백주대낮에 몽둥이로 학생을 두들겨 패 죽였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노동운동가의 장례식장 벽을 부수고 백골단이 난입해 시신을 탈취해 가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기도 했다. 피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이, 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피의 순환고리를 끊어보고자 많은 이들이 체포와 투옥을 마다않았고, 심지어 목숨을 던진 항의마저 잇따랐다. 거리에 가득했던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겁 많은 나는 백골단에 쫓겨 다니랴, 최루탄 피하랴, 호된 몸살을 앓았다. 그래도 이런 물음만은 가슴에 품었기에, 늘 거리에 서고 싶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 법 아닌가.'
그 해 겨울, 어쩌다가 나는 작은 공연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공연장에서 가까운 학교를 다녔던 탓이 컸던 것 같다. 자의반타의반으로 돕게 된 그 공연에서 나는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을, 시인 김남주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출연진 뒤풀이에서 살짝 흘겨본 것이다. 내가 도왔던 그 공연의 이름은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었다.
그 무대에서 시인 김남주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찌릿찌릿한 목소리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외쳤다. 낭송이 아니라, 차라리 고함 같았다. 대통령 권좌를 차고 앉은 정치군인 노태우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나라엔 양심수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설쳐대고 있었으므로, 그 공연은 공연이라기보다는 '시와 노래를 가장한 항의시위'였던 셈이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군인들과 야합했던, 자칭 민주인사가 문민시대를 열었고, 그의 오랜 라이벌도 대통령 권좌에 올라 남북을 오가며 새 역사를 만들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우리의 민주화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고졸 출신 대통령에 이어, 다시 고졸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을 때,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을지언정 기분만은 상쾌했다. 그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의 당선을 '상식의 승리'로 받아들이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던 듯하다.
겨울이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민가협이었다. 곧 있으면 콘서트를 여는데, 도두리 출신 가수 정태춘씨가 노래를 부를 때, 대추리 도두리의 풍경과 고단한 투쟁을 담은 사진영상을 배경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군말이 필요 없는 얘기가 오가고, 통화는 마무리됐다. 어린 시절 자원봉사했던 일에 이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그 공연을 돕게 되어 기뻤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 공연은 몇 년 전부터 이름을 달리해 오고 있었다.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은 과거의 상처와 함께 추억으로 남겨두고, 이제 '인권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아픈 상처를 고루고루 이야기하고, 힘을 북돋는 일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는 이렇게 이름의 바뀜에서도 감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마음 한 구석이 걸렸다.
국가인권위가 국가의 이름으로 인권을 돌보고,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도 시대 변화에 맞게 '인권 콘서트'가 되었다지만, 오늘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리의 인권상황과 양심수 문제에 대해 묻고 싶어 졌다. 시대가 바뀐 지금, 이 땅에 양심수는 한 명도 없는 것이냐고.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 보호받고 있느냐고. 당신께서 입에 달고 다니던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이제는 구현되고 있는 것이냐고.
청와대에는 상식이 흘러넘쳤는지 모르지만, 지난 몇 년간 내가 오갔던 대추리 도두리에서 상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상식은커녕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 사나운 발톱으로 늙은 농부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고, 맨몸뚱아리로 일군 들녘을 갈아엎어 버리는 흉폭함만이, 더러운 이빨을 번뜩였을 뿐이다.
그런 장면들을 목도했던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며, 전두환과 노태우를 떠올렸다. 집권의 방법이 달랐을지언정,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건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도 떳떳하게, 마치 노태우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는 단 한 명의 양심수도 없다"고 말할 것만 같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나는 대추리 이장 김지태의 이름을 들려주고 싶다.
올해 마흔여덟살 먹은 시골이장 김지태씨는 대추리에서 태어나 대추리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온 평범한 농민이었다. 명문으로 손꼽히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까지 졸업한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대단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고향이 좋고, 농사일도 제대로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세대는 일본군에 집과 땅을 빼앗긴 데 이어, 한국전쟁 때 다시 미군에 의해 집과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한을 품고 살아 왔다. 그런 설움을 딛고 맨몸으로 일어나 갯벌을 일구고, 오늘의 옥토를 만든 '땅 위의 투사들'이 바로, 그의 부모세대였다.
김지태씨는 그 피눈물 나는 과정을 보면서 자랐다고 했다. 대추리의 늙은 농부들과 김지태씨를 비롯한 후세대가 땅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살아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부모세대가 만들어준 기름진 땅에 자신의 청춘을 걸었다.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똑똑한 그를 마을의 지도자로 삼은 건 대추리 주민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대추리는 어디 내놔도 남부럽지 않은, 공동체가 살아있는 풍성한 시골마을이었다.
고단함을 겨우 이겨내고, 이름 그대로 '큰 가을'로 풍성했던 대추리에 먹구름이 드리운 건 미군기지확장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국책사업이었다. 살아오면서 두 번씩이나 남의 나라 군대에 집과 땅을 빼앗겼는데, 반세기가 흐른 지금 위로와 보상은커녕 다시 땅을 내놓고 나가라니,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을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로 만들겠다니, 대체 누가 그걸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 나라 관리들은 대추리의 늙은 농부들이 느꼈을 상실감을 발에 낀 때만큼도 헤아릴 줄 몰랐다. 협박과 이간질이 그들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인 듯싶었다. 부모세대의 말로 다 못할 설움을 보고 자랐던 김지태 이장은 "이대로 포기하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 것 같아서" 주민대책위를 꾸렸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주민들 스스로 뜻을 모아, 그 힘으로 만든 대책위, 이것이 기나긴 대추리 싸움의 항쟁지도부가 되었다. 항쟁지도부는 끝까지 저항하되, 비폭력으로 맞선다는 원칙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국방부에게 김지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회유도 먹히지 않고, 협박도 먹히질 않으니 오죽 미웠겠는가. 주민들의 저항이 수그러들지 않자, 경찰은 수배령을 내렸다. 시골이장을 체포한답시고, 한밤중에도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가 애써 관리해왔던 우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소들이 죽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가던 마을 주민들을 가로 막았다. 불에 놀란 소들이 날뛰고 죽는 것을 지켜보며 김지태 이장의 가족들은 비통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곧이어 국방부는 대추분교마저 부쉈고, 들녘을 온통 파헤치고 그 자리에 철조망을 둘렸다. 마을은 흉흉해져만 갔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다니던 김지태씨의 가슴은 썩어 들어갔을 것이다. 마침 국방부는 "김지태 없는 협상은 의미가 없다"며 그와 직접 대화하겠다는 뜻을 누차 밝혔다. 김지태씨는 국방부와 대화하기 위해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구속되었다. '대화'는 없었다.
재판부는 시골이장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마을이장이 (감히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그의 죄였다. 말하자면, 양심을 지키려 했다는 게 그의 죄명이었던 것이다. 저간의 사정이 이러하다.
나는 다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이 땅에 양심수는 단 한 명도 없느냐고. 과거 이름을 드날리는 인권변호사였던 당신의 양심에 손을 얹고, 추호의 부끄러움 없이 오늘의 인권상황을 말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진정 이 땅에 양심수는 없는가.
나는 당신의 상식이 대체 어디까지인지 몰라 무섭다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보라색 수건을 머리에 매고 민가협 어머니들은 거리로 나선다. 요즘 어머니들의 손에는 '양심수 김지태'의 사진이 들려있다. 해마다 겨울이면 열어왔던 그 공연이 이름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시와 노래를 가장한, 양심수 석방 촉구시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어머니들은 '목요시위'로 증명하는 것이다.
양심이, 상식과 '이음동의어'로 대접받기는커녕, 상식을 독점한 자들에게 짓밟히고 수모당해야 한다면, 그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사전에서 '미래'나 '희망' 따위의 말들을 지워버리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이 지경에 무슨 내일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간곡하게 호소하고 싶다. 바짓가랑이라도 붙들며 항의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님아, 지금이라도 당장, 김지태를 석방하라!
당신의 양심과 우리 모두의 양심을 더는 짓밟지도 말고, 가두지 말라!
-------------------------------- 덧붙이는 글 ------------------------------
* 얼마 전 세계적 인권단체인 엠네스티인터네셔널(국제사면위원회)은 김지태 이장을 한국의 양심수로 지목했습니다. 이 단체에서 정의하는 양심수는 '정치적·종교적 신념, 사회·경제적 지위 등의 이유로 투옥되거나 신체적 자유가 제한된 이들 가운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단지 고향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차마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대추리 이장님이 하루빨리 가족과 이웃의 품에 안기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실천이 너무나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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