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대추리 주민 이사가는 날
[르포] "이걸 두고 어떻게 가나.."
배혜정 기자
대추리 떠나는 날
촬영 배혜정 / 편집 홍철호
"16번 버스가 언제까지 다니나요?"
평택역에서 대추리로 가는 버스는 16번과 20번이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6번 버스 회사인 '협진여객'에 전화를 걸었다. "4월 중순까지 버스 운행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3월의 마지막 날, 공식적으로 대추리 주민들이 마을을 '비우는' 날, 오후 12시 35분 평택극장 앞 에서 16번 버스를 타고 대추리로 향했다.
△대추리행 16번 버스. 4월 중순까지는 대추리까지 운행된다.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16번 버스 기사 김모 씨는 회사의 말과는 달리 "4월 4일까지 버스를 운행한다"고 말했다. "일단 스케쥴은 4월 4일까지 잡혀있는데 시청하고 버스 회사가 협의하는 것이니까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김 씨의 설명이었다. "버스 노선이 끊기게 돼 서운하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하루에 두 세번 씩 지원나가는 형식이라 괜찮은데 이 노선을 '풀'로 뛰는 양반이 한 명 있어요. 그 양반은 좀 (마음이)그러겠더라고.."
주민 한 분과 기자 둘을 대추리에 떨군 버스가 붕 떠나버린다. 늘 마을 어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주민들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이삿짐을 나르는 이삿짐 센터 차와 1톤 트럭 몇 대만 분주하게 마을을 가로질렀다.
이틀 전부터 대추리 주민들의 이사가 시작됐고 하루에 10여 가구씩 대추리를 떠났다. 장고의 투쟁 끝에 지난 2월 13일 정부와 주민 이주 및 생계지원 등에 대해 합의한 주민들은 팽성읍 노와리에 마련하기로 한 이주단지가 완공될 때까진 팽성읍 송화리 주민공동주택에 거주하기로 했다. 총 49 가구 중 46가구는 노와리로 가기를 결정했고, 그 중 3가구는 평택 시내 등 다른 지역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솔부엉이 도서관의 책들도 이사를 간다.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주민대책위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니 솔부엉이 도서관 앞 마당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킴이들이 책을 태우고 있었다. 그동안 솔부엉이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각계각층에서 '스폰'해 준 책이 2천 여권이나 됐는데, 그걸 다 태우려나 미심쩍어 물어봤더니, "놔두고 갈 책 몇 권만 태우는 것"이라며 "나머지 책들은 송화리 경로당에 갖다놓을 것"이라고 도서관장 진재연 씨가 답했다. 지킴이 디온 씨가 "책 모으느라 수고했다"며 진재연 씨의 어깨를 두드렸다.
솔부엉이 도서관 대각선 맞은 편 김지태 전 대추리 이장 집 앞으로 1톤 트럭과 이삿짐 센터 차량이 도착했다. 트럭에서 내린 김 전 이장은 특유의 '귀찮다'는 표정으로 "아따 사진 찍지마"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한 일(一)자로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짐을 나르는 김 전 이장과는 달리 어머니 황필순 씨는 심란한 듯 혼잣말을 하며 뒷짐을 진 채 집 주변을 빙빙 돌았다.
△김지태 전 대추리 이장의 어머니 황필순씨가 집 주변 곳곳을 돌아보고 있다. 이삿짐을 옮기는 내내 황씨는 집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이 집에 산 지는 13년 됐어. 52년도에 저 짝(구대추리)에서 쫒겨나와서 이리로 와서 처음엔 그냥 불 때고 살다가 연탄보일러로 바꾸고, 그러다가 우리 아들(김지태)이 부모님 편하게 모시고 살고 싶다고 94년에 이 집을 새로 짓고 지금껏 산 거여..."
황씨는 대추리의 추억이 묻어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남기고 가고 싶지 않은 듯 반지하 창고로 들어가서 플라스틱 바구니며, 떡공이며 할 것없이 이것저것 주어담아 트럭에 갖다 실었다. 웬만한건 다 가지고 간단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3명이나 있었지만 못미더운 듯 종내는 고무장갑을 끼고 직접 마당에 버려둔 스테인레스 그릇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거 김장할 때 앉아서 쓰면 얼마나 좋은데"라며 황씨의 남편이자 김지태 전 이장의 아버지인 김석경 씨도 'ㅠ'자 모양으로 생긴 앉은뱅이 나무 의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왔다. 10개가 넘어 보이는 장독도 모두 손자들을 시켜 트럭에 실었다.
김씨와 황씨는 안방으로 들어가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가구 옮기는 것을 지켜봤다. '딸들이 새 집에서 살게됐다고 94년에 300만원 주고 사준 장롱'이 먼지를 폴폴 풍기며 밖으로 나가자 방안이 휑해졌다. 황씨는 정든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은 듯 계속 눈물을 훔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마당 안에 심어져 있는 살구나무를 두고 가는 걸 못내 아쉬워했다. 살구 잘 열리기로 유명한 김지태 전 이장댁 살구나무엔 꽃봉오리가 한껏 맺혀 있었다.
"모르겠어요. 아직 계획이 없어요. 살 길이 막막해요."
김지태 전 이장의 부인 조임순 씨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생계가 걱정스러운건 비단 이 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추리 주민 모두 송화리 전셋집에 살게 될 2년 동안은 농사를 못짓고 사는데 노인들은 그렇다치고 한창 일할 나이인 3-40대들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될지 갑갑할 따름이다. "장기적인 문제이니만큼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한 조 씨는 "당장은 이사하고 적응하는 게 더 문제"라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대추리의 젊은층과 지킴이들도 내심 노인들이 더 걱정스럽다. 고향에서 세 번째 쫒겨나게 되는 꼴이 된 노인들이 송화리 전셋살이 2년 동안 낙담해 세상을 뜨는게 아니냐는 괴담 아닌 괴담이 흉흉하게 돌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진재연 씨는 "주민들이 새로운 곳으로 가셔서 다른 걱정 안하시고 건강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다"면서도 "어제도 할머니들이 대성통곡을 하셔서 마음이 아프고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지킴이 오기성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며 "땅도 아깝고 집도 아깝고 아쉬운 마음 뿐"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추리는 이상하게 봄이 늦게 온단 말이야.."라며 옷깃을 여미는 디온 씨의 표정도 어둡긴 마찬가지다. 디온 씨도 "지금쯤 한창 모판 나르고 흙담을 시기인데..."라면서 "논갈이 투쟁할 때 정말 재밌었다"고 회상했다. 디온 씨는 지난 해 3월 경 1주일에 두세 번 농활을 들어오다 그만 대추리에 푹 빠져 직장도 그만 두고 마을에 눌러앉았다. 디온 씨는 "주민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짐을 다 옮긴 주민.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오후 4시 지킴이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황씨가 며느리와 딸들과 골목을 빠져나갔다. 손을 흔드는 지킴이들에게 "나 내일 또 올껴"라고 말하는 황씨의 걸음이 무겁다. 아니나 다를까. 5분도 안돼 황씨가 종종 걸음으로 골목에 다시 나타났다.
"저그 저 창고에 콩이랑 김치랑 있어. 갖다 먹어야 돼. 알았지? 꼭 갖다 먹어. 잉?"
△살구나무를 놓고 가는 게 못내 아쉬운 김석경 씨. 대추리에서 살구 잘 열리기로 유명한 나무다. ⓒ민중의소리 전문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