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서 명절 쇠는 기분 누가 알겠어"
한국일보 | 기사입력 2007-09-22 16:36
추석이 더 서러운 이들, 고향 잃은 '대추리'… 마지막 달동네 '난곡' 주민들
"보상금 받아 좋겠다… 남의 속 모르는 소리"
"55년 일군 땅 삼삼해… 농사꾼 억장 무너지지"
“마치 수용소 생활을 하는 느낌이야. 남의 집에서 명절을 쇠는 기분을 누가 알겠어.”
경기 평택 미군기지 이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황필순(77) 할머니. 4월 팽성읍 대추리를 떠나 인근 송화리 전세주택 ‘포유 빌리지’에서 한가위를 맞게 된 황 할머니는 불편한 숨기지 않았다. 황 할머니는 “예전 같으면 추석이라 온 식구가 한창 제사 준비로 바쁠 텐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시집을 와서 1952년부터 55년 동안 일궈 놓은 땅과 집을 하루 아침에 잃은 기분이 오죽하겠냐”고 하소연했다.
마지막까지 이주를 거부하며 남았던 44가구는 고향에 있던 ‘대추리’의 간판을 이사 온 마을에 옮겨 달았다. 끔찍한 고향 사랑이 그대로 녹여있다. 이마저도 새 동네 주민들의 양해로 겨우 이뤄졌다. 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대추리에서 서로 농사를 도와주며 우정을 쌓았으나, 지금은 노인정에 앉아 잡담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소일하는 게 전부다.
‘큰 가을(大秋ㆍ대추)’이라는 동네 이름처럼 넉넉하고 풍성했던 추석 풍경은 자취를 감췄다. 강연서(64) 할머니는 “명절이라고 놀러 온 손주들이 할머니 집으로 가자고 야단”이라며 “고향을 잃고 농사 일을 못해 수입은 없는데 매달 관리비 5만7,000원이 꼬박꼬박 나오고 전기 수도요금 부담도 커 밤에 불을 끄고 TV를 보는 이웃들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주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모르는 외지 친지들로부터 받는 상처도 있다. 서순희(69) 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동생이 ‘보상금을 얼마나 받았냐’고 물으면서 ‘언니는 이제 농사 안 짓고 돈 벌었다’고 말하길래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노인정 앞에서 고추를 말리던 서 할머니는 “매년 서울 친척들에 고추를 300근씩 보내곤 했는데, 이제 고추를 사다가 이렇게 말린다”며 “주변에서 고추 농사꾼이 고추를 사게 됐다고 말해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 조창묵(70) 할아버지는 “남들은 우리가 큰 돈을 번 것으로 알지만 대추리 남자들은 노령이지만 돈벌이를 위해 일거리로 나서고 있다”는 말로 외부의 잘못된 시선을 일축했다.
타의에 의해 고향을 ‘등진’ 대추리 주민들의 한숨 섞인 하소연은 쉴새 없이 들리는 헬기 소리와 사격 소리가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평택=성시영 기자 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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